이시우의 비판적 실천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타당성에 대한 의견서 _ 임정희

사진작가 이시우의 비판적 실천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타당성에 대한 의견서
- 한스 하케와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을 통한 유비적 검토


 

임 정 희 (연세대학교 인문예술대학 겸임교수, 문화연대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 미학·미술평론)




1. 들어가며 : 담론적이고 제도적인 장소로서의 미술을 다시 생각한다

최근 한국 사회 대부분의 미술비평은 정교한 공적 관계나 진흥기구 구실을 하는 것 같다. 미술진흥을 위한 공적 기금을 심의하고, 미술은행을 운영하며, 해외 전시에 소개할 작가들을 지원한다. 이는 미술비평이 그 자체의 정치학, 관심,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실 대부분의 미술비평의 진흥적인 측면은 더 확대된 제도적, 담론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볼 때 전시, 학술지, 미술이라는 분과, 미술관 등은 미술을 널리 알리고 지속시키는 실체들이다. 더욱이 한데 결합되어 ‘미술’을 구성하게 되는 제도와 담론들은 시장적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그 자체가 미술작품의 상품적 지위를 확립하고 강화시킨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 미술비평가는 통상적으로 미술시장의 다원주의와 미술관이라는 엄숙한 공적 공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미술시장 규모의 비약적인 증대, 명성을 만들어내고 수요공급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중요해진 화랑의 역할, 미술전문가(전시기획자, 미술평론가, 미술기자, 큐레이터, 아트펀드매니저 등등)들의 출현, 기업들의 미술시장으로의 입성 등의 현상들은 미술비평을 효과적으로 잉여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비평이 잉여화되고 있다는 것은 시장의 힘과 그것의 제도적 비준 사이를 견인하던 장벽이 사라졌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뚜렷한 예로 미술교사 김인규의 경우처럼 사진작가 이시우의 구속도 우리 시대의 미술창작 내에서의 비판적 실천이 미술비평의 관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담론적이고 제도적인 장소이다. 미술사적으로 다양한 미술운동들이나 새로운 창작방법을 통한 미술실천들, 전통적인 미적 개념을 질문하는 미술작업과 같은 미술 내적 비판이 비판적 실천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미술비평적 담론을 통하여 미술이라는 문화적 장소가 다른 어떤 것 못지않게 쟁론에 개방됨으로써 저항과 변화를 위한 사회적 영역으로 제공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사회에서 미술은 제도적, 담론적 억압이 매우 심한 장소이다. 정치경제적인 조건들이 미술제도적 공간을 일방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미술은 단지 미술 내적 발전하고만 관계있는 진화를 거듭해 왔다. 관습에 대한 폭로, 이데올로33기에 대한 검토조차 하나의 미술양식, 하나의 미술태도로 간주되어 비판적 독자성을 획득하기는 커녕 한 구석으로 밀쳐져 무시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미술작업은 상업화에 순화되고 상품화되는 것이 중심적 쟁점으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이러한 과정에 굴복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담론적, 제도적 결정요소들에 대한 비판, 개입 그리고 분석은 제도적 미술공간의 외부로 치부되었고 포기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로 미술가들이나 미술비평가들이 미술경매 시장에서 박수근의 작품 한 점이 45억에 거래되었다는 사실에는 동요하지만, 사진작가 이시우의 구속에는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비판적 실천이 사라진 미술에서는 미술작업이 직면한 쟁점도, 미술작업현장도, 미술작업의 시의성도, 미술작업이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적 시기에 의해 결정되고 변화를 거듭할 수도 없게 된다. 제도적 미술공간은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어 서로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따로 그러나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미술비평가로서 이시우의 작업을 제도적 사진예술에 대한 비판적 실천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우리 시대 사진창작 내에서의 비판적 실천의 상태를 기술하고자 한다. 비판적 실천은 정의상 통상적인 상업적인 사진창작 및 사이비 표현주의에 의해 예시되는 현란하고 자극적이며 무분별한 사진생산과 대조되어 저항의 장소를 차지한다. 그 저항의 장소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은 무엇에 저항하는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무엇이 사진창작의 비판적 실천을 정의해주며 무엇이 사진창작을 비판적 실천으로 인식해 주는가를 묻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비판적 예술실천과 정치적 실천이라고 인정할 만한 것들의 차이를 구성하는가? 그리고 사진의 비판적 실천의 개념에 어떤 것이든 일반적인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사진(예술)의 비판적 실천이라는 것의 조건, 가능성은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타진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나의 미술비평적 설명이 사진작가 이시우의 흔치않는 비판적 예술실천을 보다 정교하고 심도있는 미술문화적 맥락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 일상적인 용도의 사진 :

정형화된 방식을 통해 사회적 지표의 기능을 제한적으로 수행하기

사진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 또는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거나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이거나 거의 예외없이 매우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방식의 측면에서 널리 경험된다. 카메라는 가족과 친지들의 만남과 휴가 혹은 여행의 기록을 위해 지니게 되는데, 이 때 만남이나 여행의 장소는 대부분 가정생활에 대한 의례의 범위 내에 있으며, 의례가 중시되는 순간들 -예컨대 결혼, 돌이나 환갑 등의 기념일-에 맞춰져 있다. 카메라는 가족모임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를 만들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하여 단순히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된다. 여기에서 사진은 그 자체 고유한 미적 기준을 가질 수 없고, 사물들을 포괄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라는 게 가장 일반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수동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되는 카메라는 그 이상으로 능동적이다. 왜냐하면 사진적인 기록은 가족모임의 취지를 구성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으며, 전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통합적 이미지를 재생산해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메라는 하나의 투사도구이자, 가족의 응집이라는 (단란함과 번창, 성공과 행복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의 일부이다. 따라서 사진의 객관성이라는 통념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사진으로 기록된 대상이 형식적 관념의 실현을 위한 구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편 모더니즘 예술에서는 이러한 통념이 매우 원시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사진을 하나의 전체로서 포괄하려는 것은 매우 상투적인 제한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진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간주된다는 것, 만들어진 기록이 객관적 사실성으로 강조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사실로 정의하려는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다. 어떤 결혼식 사진이 결혼한 사실을 입증한다던지, 어떤 환갑잔치 사진이 환갑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어떤 휴가사진이 여행지의 방문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것은 사회가 사진에게 리얼리즘이라는 특허를 부여하면서,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사회적 조건을 구축하여 동어반복적인 사회적 확신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시도의 극단적인 역사적 사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들 수 있다).

사진이 왜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문화실천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협소한 사회적 기능에 머물고 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사진의 주제들과 사진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얼마나 집요하게 정형화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사진의 주제,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반복되는데, 그것의 배치도 극히 제한된 형식규범들을 따르고 동일하게 반복된다. 인위적인 배치에서는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흔적은 배제되고, 정면성과 더불어 뚜렷한 중심성이 원리로 자리잡는다.
예를 들어 보자. 결혼사진의 목적은 결혼식에 엄숙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결혼은 결혼식이고, 진정한 결혼식은 정중하고 화려한 결혼예복을 입은 커플과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신랑측과 신부측의 하객들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진을 찍은 커플은 참으로 성공적인 결혼을 한 셈이다. 돌 사진이나 환갑 사진에서는 잘 차려진 돌 상이나 환갑상을 앞에 두고 상 뒤편에 가족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 때에도 돌이나 환갑을 맞는 사람을 중심으로 좌우, 뒤로 하객이 자리한다. 풍성하게 차려진 잔칫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참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시작하거나 성공적인 인생을 산 셈이다. 의도를 완벽하게 성취한 이러한 사진들은 정형화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심지어 신혼여행사진의 경우에는 다른 커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신혼여행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물들은 제한되어 있고, 반복 출현함으로써 가치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방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실천되고 있는 사진은 알레고리나 표의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특징들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주변환경은 순수하게 상징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에서는 우연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괌에서의 신혼여행사진에는 괌 주민들이 없고, 결혼사진에는 커플의 사랑 역사는 사라지고 예식만 남는다. 단지 어떤 결혼예복을 입었는지, 어느 곳이 신혼여행지였는지가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표현하는 몰시간적인 기호가 될 뿐이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우리 한국사회에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이 사진 실천은 정형화된 방식을 통하여 사회적 지표로서의 사진이라는 협소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들어진 사진 기록을 객관적 사실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관습에 따른 것 일뿐, 사진이 객관적 사실을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기록하는 기계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들어진 사진 기록들은 리얼리티의 현장인체 하며 이미지의 상정된 객관성을 주장하는 진실성이라는 특징을 갖지만, 그것들은 실제로는 사진사에 의해, 그리고 주어진 생산물(사진)의 임무-사회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욕망들을, 사회적 욕구의 관념들을 주입시키는 임무-에 의해 투사되고 있는 리얼리티인 것이다.

3. 공인된 영역의 예술사진 :

사회문화적 차이를 배제시키는 통합주의 기능을 수행하기

그렇다면 일상적 용도의 기초적 사진과 달리 예술사진은 어떤 고유한 미적 기준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종류의 사진 실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술사진이 지닌 차별성은 미적 리얼리티라기보다는 사회적 효과에 기인한다.

예술사진들이 다른 예술, 회화나 무용, 음악, 연극 등으로부터 주관적 표현성이나 독창성, 형식적 단일성 등의 미적 관념들을 빌리기는 하지만, 사진의 기계적 본성은 이러한 미적 관념들을 사진에 적용할 수 없게 한다. 근대 서구 예술에서는 표현성, 독창성, 유일성과 같은 미적 기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는 다른 의식의 저장고로서의 예술가(일종의 ‘천재’)에 기초하고 있다. 예술가는 독창성의 근원이자 주관적 반응의 원천이며, 세계와 대면하기는 하나 세계의 일부가 아니어서 세계와 비판적 거리를 취할 수 있는 존재였다. 모든 차이들의 근거로서의 예술가는 단일하고 일관되며 자율적인 주체로서 예술의 근원이자 중심이었던 것이다.

사진의 발명은 예술작품의 희귀성, 그 예술가의 독창성, 그것을 만든 작업의 일관성, 그리고 자기 표현의 개별성이라는 전체 관념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전체 예술의 망에 의해 유지되는 독점체계의 산물은 아닌지를 질문케 하였다. 사진의 복제기술은 예술을 사회적 제도로서 의식하게 만들고, 보수적인 문화적 전통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진보적인 잠재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말에 따르면 기계적 복제를 통해 박탈될 수 밖에 없는 것, 복사물의 증식을 통해 감소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원본의 현존과 진정성이다. 그의 표현방식대로 “기계적 복제 시대에 소멸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라는 것이다. 아우라의 쇠퇴가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부각되면서 기계적 복제를 주도한 사진은 아우라의 회복을 꾀하는 문화적 기획들의 의식적 반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에서 아우라의 고양은 사진작가의 손질을 강조하거나 리얼리티 자체나 그 밖의 어떤 것과도 혼동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의도되었다. 예술가 신화가 재등장하였고, 주관성의 기치에 포섭된 양식과 방법들이 예술사진이라는 공인된 영역의 항목이 되었다.

예술사진에서는 변형(이것은 대중매체 재현의 효력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는데, 대중매체 이미지를 전용하는 예술에서부터 자신들의 예술스타일을 재전용하는 데 까지 이르고 있다)과 자기지시적 장치들이 강화되어 나타나는데, 특히 전용 전략이 문화 전반에 동화됨에 따라 재현 그 자체는 하나의 특수한 맥락 내에서만 작용하고 동원된다. 즉 예술사진에서는 맥락적으로 규정되는 재현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제들을 은폐하는지를 담아내고 감쌀 수 있는 담론의 구성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사진의 실천은 예술가의 작업과 비평가의 작업이 서로 협력하고 의제를 공유하면서, 발화나 송신의 형식이 다른 경우라면 인지되지 않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을 의미, 가치, 신념들을 언급할 수 있는 논쟁적인 (사회문화적) 공간을 확립할 필요를 강조한다.

예술비평에서는 예술 내부/외부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미적 규정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시하면서,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일반적 인정을 전제한다면 예술생산 내에 모든 실천들은 불가분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정치경제적 조건들과 문화 영역에서의 상황의 특성들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비평에서 예술사진의 실천이 실제로 또는 이상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만 하는지를 자신있게 말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문화생산의 조건들이 매우 복잡하고 변수들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예술사진의 사회문화적 맥락, 즉 그것들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배제하는가를 식별하는 데에는 고도의 실천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실천적 감각이 정치경제적 조건들과 문화 영역에서의 상황의 특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사진의 형식과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술사진의 실천의 개념을 정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 실천적 감각의 필요가 예술작품이 생산, 수용, 유통되는 조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술의 상품화와 상품의 심미화가 동시에 급속하게 진척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예술사진은 상품문화의 이미지 세계와의 동일화를 추구하고, 광고·패션사진은 광고 관습을 벗어내고 혼란의 효과를 통해 창조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맺어지고 있는 친숙한 조화나 차이의 배제는 제도적 결정요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사진예술에서는 이 동화의 과정을 순응적으로 긍정하고 신속히 받아들이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이들의 상호교체 가능성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탐구하여 쟁점화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예술사진들이 제도적 경계들을 논쟁적으로 쟁점화하여 보다 확장되고 개방적인 사회문화적 공간을 확보하는 모범적인 사례들로 작용하기 보다는, 차이의 배제를 정착시키는 통합주의적 기능에 앞장서고 있다는 우려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 예술사진의 기호 아래 다양한 사진 실천들의 비판적 차이가 배제되고 미적 담론의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단일체를 구축하려는 의도는 과연 없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예술사진들은 예술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역 속으로 해소되기를 가정하고 있는 것 같다.

4. 정치적 내용과 도덕적 함의를 피할 수 없는 현대의 미술

현대의 미술은 정치적,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쟁점들과 이데올로기로 포화상태가 되어있다. 개별 미술가가 이러한 쟁점들을 의식하는 정도와 관계없이 미술가는 미학적이며 기법적인 대안들을 선택하며 그러한 쟁점들에 응답하고 있다. 미술가들은 미술이 소통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데 근거를 둔 미학과 관계맺고 있으며, 미술에 있어서의 현실이란 미술작업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미술에 있어서 작업방식과 관계된 선택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실천적 태도가 된다. 미술가들은 보다 깊이있는 차원에서 스스로를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경쟁의 참여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미지의 것에 형식을 부여하는 힘들의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시대 미술은 정치적 내용과 도덕적 함의들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비평은 미술가들의 시야와 의식, 목적을 포함하여 미술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현대의 주요 특징들인 물질적, 사회적, 지적 변화에 대해 지속적인 감수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현대 작품들에 대해 혼동스럽거나 단지 괴로운 반응만을 보일 뿐이다. 일례로 과거의 고전적 가치들에 전념함으로써 새로운 작품들과 이념들에 반대하는 방어벽을 제공하는 비평들은 개별 작품에 대한 지적 음미나 문화적 득실과 관련한 심도있는 토론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닫힌 미술계 내부의 논쟁의 연막이 될 뿐이며 사람들이 미술로부터도 멀어지게 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현대미술에서는 이전에 정치적 참여의 성격을 띤 작품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 결정되고 고정되어 있는 수신자의 위치, 그리고 훈계적이거나 교수법적인 비판방식 등은 더 이상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문시되고 있다.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예술가가 한편으로는 각 작품마다 미술의 맥락 속으로 편입될 수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지배적 미학에 의해 정치적 비판이 희석되지 않도록 특수성을 보이는 양식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이해 가능한 형식을 만들어내는데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4. 1. 정치적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Hans Haacke의 경우

이런 문제에서 유용한 효과를 보여준 예는 정치적 개념미술가로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고 있는 한스 하케 Hans Haacke이다. 그는 마네 E. Manet의 작품을 소재로 한 <마네-프로젝트>(1974), 쇠라 G. Seurat의 작품을 소재로 한 <쇠라의 ‘포즈를 취한 사람들’1888>(1975), <초콜릿 명장>(1981)에서 작품의 소유권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고급문화의 토대 - 즉 권위있는 미술기관과 부유한 미술가 그룹, 미술관 후원자들(나치 시대의 과거 경력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산업계의 대표로 안착한) 등이 맺고 있는 동맹적 관계 -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내고 또 어떻게 해서 문화가 사회사와 정치사의 일부가 되는지를 밝혀주었다. 하케에게서는 작품을 제작하는 수단의 일부가 조사인데 이는 미술사의 전형적인 조사방법과 유사하지만, 미술사의 의례적 조사가 작품의 보증에 국한되어 작품의 가치를 설정하는데 그치고 있다면, 하케의 오랜 시간에 걸친 조사는 더 깊숙이 밀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미술산업에 대한 지원체계에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여기 알칸 사가 있다>(1983)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알루미늄 생산업체로서 약 35개 국가에 자회사와 지사를 두고 있는 알칸 Alcan사를 심층 조사하였다. 이 작품에는 다국적 기업인 알칸 사가 재산을 증식시키는데 어떻게 문화를 이용하고 있는지, 성공을 위해 어떻게 여론에 영합하고 있는지, 각국의 지사들이 지사가 있는 국가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정책에 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회사 이미지 구축을 위한 외부의 투자와는 달리 지사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열악하고 인종차별적 노동자탄압은 얼마나 악랄하게 자행되었는지의 정보가 사진과 사진 밑 패널에 긴 설명으로 담겨있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마거릿 대처 수상의 초상과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회사인 다국적 기업 사치 Saatch & Saatch 사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이루어진 작품, <주식취득>(1983-84)에서도 하케는 영국정부와 사치 사의 밀월관계에 대해, 그리고 공공기관 위원회에서의 지위나 내부정보에 의해 발생되는 이익과 미술계에서의 개인적 이익 사이의 관계를 상세히 밝혔다. 부와 권력의 결탁에 종교적인 함축성마저 가미한 이 작품은 대처 정부와 사치 사가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들과 19세기 보수적인 정책들을 이어받고 있는 혈통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외에도 붉은 카펫을 두고 레이건과 반핵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작품, <마르셀 브룻테어스에의 경의>(197-)도 <주식취득>처럼 레이건의 보수적 정책을 전통적인 아우라를 재부여하는 미술형식을 통해 조롱조로 전달하고 있다.

하케는 단일한 재료나 단일한 접근방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유용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면 방법론을 보여주는 전시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업방식은 하나의 고정적인 양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작품이 원래의 맥락에서 옮겨졌을 때는 그 신랄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작품들에 대한 기록을 만들고 전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실제의 특수성이 일반화된 정치적 진술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의 정치적 미술작업은 각각의 작품마다 개별적인 역사적 맥락을 다루기 때문에 좌파 예술가들이 이데올로기의 기계적 속성들을 만들어내는 경향 때문에 불필요하게 받게 되는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작품판매에 의존하여 생활을 해결하지 않기 위해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대중적 담론을 위해서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 상업화랑 전시나 미술잡지 게재 등을 적극 수용한다.

미술작가 한스 하케는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그에 필요한 내용들을 조사하고 수집하여 그 결과를 특정한 시각적 수단을 사용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람자들은 고급미술이 여타의 의식산업의 산물만큼이나 사회정치적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자본주의 체제의 신성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술활동은 구조적으로 정부 재원의 지원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납세자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미술관이 자신의 제도적 의무는 방기한 채 특정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색채에 얼마나 충성을 바치고 있는지를, 공식적인 문화기관들이 검열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과세 혜택을 받고 있는 보수재단들의 집단적 영향력이 국민들의 정체성 형성과 국가의 문제에 대한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드러난 현실은 아직 지각되지 않은 요소들 및 숨겨진 현실을 모르는 이들에게 공개된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음을 시사받게 되는 것이다.

진보적 정치학과도 일치하는 이러한 현대의 미술작업은 종종 미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의 경계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의식의 증가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사회현실로부터의 퇴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과의 더욱 심각한, 더욱 깊이있는 교전의 힘과 가능성을 요구한다. 미술비평적 관점에서 한스 하케의 작업의 진가는 비미술로 이동시키거나 반미술적인 태도를 취하는 부정적인 확장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진지한 관심사의 틀 속에 미술을 재도입하려는 노력에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4.2. 생태적 사진작가 얀 아르투스-베르트랑Yann Arthus-Bertrand의 경우

<하늘에서 본 DMZ>(2005.08.10-09.11) 사진들로 한국에서 전시를 가진 얀 아르투스-베르트랑Yann Arthus-Bertrand은 1995년부터 ‘하늘에서 본 지구’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진행 중이며, 그 간의 항공 사진작업들은 전시를 통해 소개되고 관련 글들과 함께 책으로 출판되어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세계적 작가이다. ‘하늘에서 본 지구’ 프로젝트의 작업은 생태론적 예술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하늘에서 본 DMZ>는 ‘하늘에서 본 한국’이라는 전시에 포함될 예정이며, 이 전시 또한 지구의 초상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획되어 있다.

서구에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강하게 대두된 것은 1960년대 수질오염, 대기오염, 해양오염, 지구온난화, 사막화 현상, 오존층 파괴와 같은 자연환경문제를 지구라는 하나의 ‘생태계’가 처해있는 심각한 위기의 징후들로 인식하게 되면서이다. ‘생태계’라는 개념은 생물학의 하위분야로서 시작한 생태학을 메타이론으로 확장시키면서, ‘생태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하게 되었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사회 구조에서 그리고 개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생태론적 패러다임으로 제시되었다.
생태론적 패러다임에 따르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서로 ‘연관’과 ‘순환’의 체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복잡계complex system’를 구성하는데 이를 ‘생태계ecosystem’라 부른다. 인간이든, 곤충이든, 돌이든, 꽃이나 나무이든 모두가 ‘생태계 내적 존재’이다. 인간이라 해서 생태계 외부에 존재하면서 이 체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 조정,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체계의 원리에 따라 생태계를 한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생태계’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개별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웃과 미래와 함께 하는, 시·공간적 보편자로서 존재한다.

생태계는 상호연관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므로 자연환경문제가 단순히 물리적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연환경과 더불어 공진화하는 모든 생물체들(인간을 포함하여)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생물체와 연관을 맺고 있는 무생물들에게도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드러난 환경 위기라는 형식은 모든 생물의 위기를 의미하며, 인간의 사회활동으로 초래된 생태계의 재생산 위기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회 존재방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현대 문명의 위기이고, 이것은 이러한 거시구조에서 배태되고 충족되는 미시적인 욕구와 욕망에 기반한 일상의 위기를 의미하게 된다. 결국 매우 추상적으로 보이는 전지구적 자연환경 문제가 우리 자신 각자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순환되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론적 인식은 인간의 자연 지배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도구적 자연관이나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또한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생명체도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웃과 미래사회, 다른 생물체와 무생물체, 자연에 대한 배려를 인간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한계 능력에 대한 겸손과 공동의 세계에 대한 절제의 윤리는 생태론적 인식을 구성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담론, 자연과 인간 및 자연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은 인간중심적이고, 이원론적이며, 위계적인 근대적 자연관에 대한 심층적인 비판과 더불어, 이성 또는 과학의 이름 아래 억압되고 배척되어 온 것들, 즉 외적 자연과 사회적인 타자, 그리고 인간 자신에 있는 억압된 자연 등에 대한 회복과 복원 노력으로 연결되면서 생태론적 인식의 다른 축을 구성한다.

지구상의 인류는 단순히 생명을 영위하며 우주 생명계에 속한다는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차원 외에도, 지구 곳곳에서 언제나 참으로 다양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역사적으로 발현시켜왔다. 생태론에서는 종종 예술 또는 문화라는 것이 간과되고 생물학적인 상호의존성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문화는 인간의 본래적인 자연현상이므로 지구 삶의 문화적 차원이 도외시될 수는 없다. 지구생태계를 진화론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강조하다보면 세계와의 교감, 우주적․자연적 전체에의 참여를 목적론적으로 강제하게 될 우려가 있고, 자연의 합목적성이 생태학적 감성의 ‘가능성’, 또는 차이로 드러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이한 의미들과 가치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인간 자신,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에 이르는 관계 및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생태론은 생태론적 감성과 더불어서야 지구생태계를 전일적인(옴살스러운) 전체로 관계맺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론적 예술작품은 ‘생태계 내적 존재들’과 그들의 연관 그리고 순환 체계들이 우리의 감정과 사고들, 언어들과 행위들(넓은 의미의 예술형식들)을 통해 감성적으로 지각된 현실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감성적 지각은 감정을 야기하고, 감정은 쾌·불쾌의 감정만이 아니라 느낌, 정서, 직접적인 정서적 태도 등을 포괄하면서 다양한 연상들을 통하여 의미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연상들이 현실의 전체, 즉 ‘우리의 세계로 받아들여진 지구’ 전체를 포괄한다. 즉 생태론적 예술에서는 작고 가까운 것, 또는 여기로부터 크고 먼 것으로, 또는 저기로 확장할 수 있는 상징과 거시세계와 미래세계를 미시적이고 현재적인 차원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는 기술을 토대로, 예술가가 지구생태계를 우리의 세계로 해석하고 매개한 미적 현실을 보여준다.

예술적 현실은 그 예술적 대상들을 넘어, 또는 그를 꿰뚫고 덧붙여지는 해석들, 비평들, 이론들의 총체이다. 예술적 현실이 그저 가상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물리적 구조를 지닌 작품이라도 해석에 따라, 비평에 따라, 이론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적인 ‘작품’이 된다. 가상은 이미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어 경화된 실증적 현실을 벗어나 움직이며, 변화하는 현실을 미적으로 ‘선취’한다. 따라서 예술적 현실은 생물학적 현실 또는 실증적 현실보다도 실제적일 수 있다.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의 ‘지구’ 연작들은 생태론적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사고, 신념, 업적 등의 총체성과 직면하는 작업이다. 필름과 인쇄를 통한 작품과 작업방식의 동시적 전송은 전세계의 보편적인 사진언어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은 표면적 근접성에 제한되어 있다. 사진작품들은 그 자체 원인이 되는 경험을 전달하는 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투스-베르트랑의 항공 사진작업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 혹은 복원과 치유가 가능한 지구를 전유하는 쪽으로 방향지어진 그의 열정과 기술을 구체화하는 데 있다.

그의 작품의 진정성은 미술 내 시각적 관습들로 변화해 온 양식들과 이미지들을 뒤엎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정서적으로 공허한 이미지들(앞서 3항에서 지적한 예술사진들의 경우가 대체로 그러하다), 장식의 다양한 범주들( 앞서 2항에서 지적한 일상적 용도의 사진들이 그러하다)로 나타나는 사진의 끊임없는 양적 증가가 새로운 아카데미즘의 발흥을 조장하고 있는 반면,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의 작업은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 지브롤터 해협의 군사비행장, 캄차카 반도의 활화산, 아이슬랜드의 빙하 강, 금광의 유독성 폐기물이 흘러나온 민다나오 섬 앞바다, 유목부족의 위태로운 삶의 터전인 아프리카 나미비아 북부의 쿠베베강, 사막화가 진행되는 한가운데 남아있는 밭 등등. 문명이 가한 지구 곳곳의 충격의 현장과 그로 인해 야기된 미래의 불확실한 조건을 방대한 지리학적 정보 위에 경제적, 철학적, 정치적, 생태적으로 맥락화하고 있다.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묘사하고 분류하는 것은 창작의 목적과 관련하여 허식과 관료주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의 사진전이 관람료나 폐관시간 없이 열린다거나(24시간 야외 무료전시회는 전세계 50개가 넘는 도시에서 5000만명 이상의 관람객에게 공개되었고, 30개 도시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그의 사진책들이 여러 영역에서 생태환경적 실천을 펼치고 있는 이들의 글들과 함께 게재된다는 것( 그의 사진책들은 3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350만권이 팔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은 그의 사진미술의 국제화가 양식과 의미의 동질성을 통한 고급예술의 허식과 관료주의 형성에 기여하는 대신, 에너지의 분산적 집중(민주주의)과 의지의 결집(생태주의)이라는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은 물질과 장소와의 관계, 시간성의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탐사한다. 문명의 시간과 문명 이후 도래할 시간이 접혀진 역사적 장소를 찾아 반복적으로 매우 험난한 탐사에 나서는 작가는 미술이 안정적으로 상징하는 주체, 개성, 언어, 의미, 작업실, 장르, 미술관 등의 모든 경계들을 넘어서, 지구적 삶의 문제를 우리 시대 문화형식의 주제로 돌출시키고 있다. ‘촬영불가’라는 조건을 달고 <하늘에서 본 DMZ>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된 역사적 장소들은 식민지와 전쟁과 분단의 추상적인 경험을 구체적인 다양성의 현실로, 수많은 시각의 입체적 현실로, 아직도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실로 다가서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항공 촬영을 허가한 국방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경기도, 산림청의 공적인 제도적 공간들이 이를 계기로 종래 견지되었던 역사의 이해와 서술방식의 단일성을 벗어나, 개인적, 집단적 감수성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5. 나오며 : 사진작가 이시우의 경우 - 비평으로서의 사진

현대의 미술은 새로운 형식, 모티브, 실험적 태도의 쇄도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우리 시대의 미술은 그 자체가 경험, 지식, 그리고 재능 이외에도 용기와 독립심을 요구하는 비평이다. 이것을 지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서는 미술 자체의 역설, 모호함, 일탈을 억압하지 않는 표현과 다각적인 전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미술창작에 대한 법적 평가의 혼동 및 법적 평가와 평가를 적용하는 미술 간의 장애를 해소하거나 적어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미술이 모든 장소와 시간을 다루게 해준다고 볼 수 있는 초역사적 특질이나 표현형식 같은 추상적인 보편성을 배제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의 탐사가 건네는 긴장, 한스 하케의 심층 조사가 건네는 신랄함은 맥락을 끊고 구체성없이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위기감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수단일 수 있고, 표현형식들은 비미술일 수 있으며, 반미술적 태도로 공격받을 수 있다. 따라서 미술작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낡은 요소의 체계들을 벗어나 미술가의 행위, 갈등, 의도, 창조적 가설 등의 구체적 분석으로 대체되는 것이 시급하다. 이 때 구체적 분석에는 각각의 작품이 그 창작자의 이전 작품들을 포함해 이용할 수 있는 양식들과 작품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가능성들에 관한 선택을 구체화한 것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술가의 모티브를 해석하지 못하고 미술이 관행을 지키게 하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구체적 분석이 검열에 불과하거나 비행을 감시하는 경찰로서 기능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분석이 될 수 없다. 예술작품의 분석이 결코 의무 불이행에 대한 보고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의 비판의식을 관료적인 동의의 구조가 대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비판적 통찰력을 지닌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유용한 존재가 되려면, 사회는 예술가 집단과 그들의 창작물을 향한 폭넓은 실천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가능하다. 사회적 평준화의 수위를 벗어난 하케의 집요한 조사작업과 아르투스-베르트랑의 방대한 규모의 작업이 일방적인 사회적 지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두 사람의 작업들이 재정적 후원이나 행정적 편의를 제공받으며 순탄하게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혁신에 대한 개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의 창조, 지적 이해가 그들 작업과 병행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으로써 유효성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판적 예술실천의 전통 내에 존재하는 지속적인 반역의 긴장이 관료적인 동의의 구조(검열이나 배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면, 신비화와 애매모호함으로 이루어진 미술 이외에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확장하는 어떤 창작도 멈추어버리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역사적 사례는 수없이 많다).
미술비평가로서 나에게는 사진작가 이시우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 중에서도 정치적 내용이 두드러진 한스 하케의 작업, 도덕적 함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의 작업과 유비적으로 읽혀질 뿐, 결코 정치적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도, 비도덕적인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우리 시대, 한국 사회에서 미학적 실험과 윤리적 태도의 결합을 시도하는 실천적 작업을 지속해 온 이시우가 사진작가, 예술가의 특권을 전유하여 그의 작품들을 정치적 선동 도구로 또는 왜곡된 역사 형성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작가 이시우가 오직 미술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작가는 자신의 이념, 즉 자기지시적 기호로서의 작품에 참여했을 것이다. 자기동일성을 추구하는 작가라면 자신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경험의 총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모든 내용이 새로운 작업방식의 연마와 미학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통로가 될 뿐이라면, 주제는 완전히 배제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소위 ‘순수한’ 작품이라는데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이시우의 사진작품들은 분명 순수주의 혹은 형식주의 작품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의 사진 작업은 다양한 미술이론을 근거로 한 미술운동들과 개인적 기질 간의 긴장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시우는 사진을 찍는 행위에 의해 실현되는 특질들 - 이 특질은 사진작업을 부추기고 그 양식을 결정짓는 이론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자신에 관한 작가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충동 및 그가 직면해 있는 미술로부터 나온다-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는 개성도 이념도 아니다. 그러나 작품 이해를 위해서는 현대의 미술운동들이 벌여 온 아르투스-베르트랑이나 하케와 같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대안들과 친숙해져야 한다. 미술가가의 지적 상황도 미술(사진) 자체 내에서의 계속적인 이념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될 때, 보다 구체적인 맥락을 획득한다.
사진작가로서 이시우는(얀 아르투스-베르트랑이나 한스 하케의 경우처럼) 사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으로 확인되는 사진의 시각적 양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진의 시각적 양식이 지향하는 정서적, 지적 목적에 이시우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시우의 사진작품들이 정서적, 지적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 한 이시우는 예술가로서, 사진작가로서 예술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2007.06.13

by 묽은늪 | 2009/06/29 22:17 | 어지러운 소식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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